맨몸의 시간
권행은
바람이 노을의 목줄을 비트는 무렵
사과를 모두 떨군 사과나무가
시린 젖줄을 말리고 있다
여름이 남겨둔 벌레들은
나무의 순결을 다 먹어 치우고
새들이 떠나간 자리에 거푸집을 짓고 있다
등허리에 옹이가 생기면
별이 된다는 소문이 잎그늘 사이를 훑고 지난 후
나무의 옆구리에는
아픈 옹이들이 덕지덕지 늘어났다
거미줄 무성한 벌레구멍 속으로 노을이 깊어진 나무는
그 흔한 별똥조차 보지 못했지만
벌레와 함께 부푼 사과들은
단 맛 드는 살을 위하여
밤마다 홀로 황도를 횡단하는 나무의 터진 발등을 보았다
이제 제 치마 밑으로 한 세상을 떨구고
훗배앓이 하는 사과나무, 꿈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거룩한 낙타여서
꿈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가늘어진 햇살을 환청과 섞고 있다
미안해
불덩이 같은 사과 알을 낳지 못해서
미안해, 벌레 먹힌 채로 별을 꿈꾸어서
미안해 몸이 밀어올린 사과의 참맛을 알지 못해서,
벌레집만 붐비는 사과나무가
마지막 남은 謝過를 조용히 바닥으로 떨구고 있다
—《시와 표현》2014년 여름호
틈
고백하자면
당신이 찾아오는 틈과 틈 사이에서
눈 코 입은 마그마처럼 흘러내려
이런 것들이 바로 시인가 생각하면서도
틈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게 고질적인 습관이야
빈 곳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틈
꽃과 무덤과 별들의 누대가 조용히 풍장되는 틈
우주 먼 곳에서부터
게으른 내가 나를 찾아 유기하는 틈
틈이 생겨서 어둠에도 용케 싱싱한 눈이 쌓이지
나는 즐거이 킬 힐을 신고 틈 사이를 위태롭게 걷지
별 볼 일 없는 틈새에 항상 당신이 있어서 라고
괄호를 치며 걷고 있지
다리 사이로 순환하는 틈, 혹은 괄호의 바깥
아파트 벽 틈에서
결연한 그늘이 탈구되어 나올 때
말할 틈도 없이
옹색하고 비좁은 말의 통로는 막히고
그 사이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소음,
소음이 전부인 아파트의 무게로 킬 힐도
굽이 닳아 낮아지지
굽이 납작해지는 킬힐도 킬힐일까
뽀족한 햇살이 그늘로 납작해지는 하루도 하루일까
종일 틈의 마법에 걸려 낡아가는 당신도 당신일까
말없이 낡아가는 아파트 벽을 위해, 마지막으로
당신을 나의 춤이라고 주문처럼 외우면
기억 속의 틈이
성큼
보일까,
싱싱한 당신, 담쟁이 이파리 같은 시가 보일까
—《열린시학》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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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행은 / 1962년 전남 광양 출생. 2006년 《미네르바》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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